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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전기영화 오스틴 버틀러, 평론, 바즈 루어만

by 올다 2025. 4. 27.

엘비스 영화 포스터
엘비스 프레슬리 전기영화

엘비스 전기영화, 오스틴 버틀러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대는 내게 하나의 전설이었다. 반짝이는 점프슈트와 허리를 흔들며 관객을 사로잡던 모습 그리고 마이크 앞에서 울려 퍼지던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도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엘비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다시 만난다는 소식은 처음부터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오스틴 버틀러였다. 오스틴 버틀러가 엘비스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세간의 반응은 엇갈렸다.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경력을 지닌 배우였지만 과연 그가 엘비스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존재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엘비스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20세기 대중문화의 흐름을 뒤흔든 존재였고 수많은 이들의 감정과 꿈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기에 단순한 모창이나 흉내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영화 「엘비스」가 시작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내 모든 의심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스틴 버틀러는 단순히 엘비스의 외형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엘비스라는 인물의 깊숙한 내면과 무대 위의 화려함과 무대 뒤의 고독을 모두 몸으로 그리고 표정과 숨결로 표현해 냈다. 처음엔 그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진짜 엘비스처럼 울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광채 그리고 그 광채가 꺼진 뒤 홀로 남은 외로움까지 오스틴은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그가 'If I Can Dream'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뻔했다. 그 노래에 담긴 엘비스의 절망과 희망 그리고 세상을 향한 간절한 외침이 오스틴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스틴 버틀러가 이 역할을 위해 치른 대가였다. 그는 몇 년간 엘비스의 억양을 연습하고 그의 무대 영상을 분석하며 심지어 일상생활에서도 엘비스처럼 말하고 움직이려 노력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엘비스 특유의 억양이 입에 남아 있었다는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그의 연기에 담긴 진심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역할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엘비스의 삶을 살아낸 것이었다. 그래서 오스틴 버틀러의 엘비스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한 시대를 관통하는 진짜 감동으로 다가왔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끊임없이 신화와 전설로만 소비되어 왔다. 그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상처는 종종 화려한 무대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스틴은 이 영화에서 엘비스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끌어안았다. 화려함 뒤에 숨어 있던 불안 그리고 세상 모두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채워지지 않는 고독을 오스틴은 그 이중성을 너무도 세밀하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은 절제 속에서 표현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엘비스가 마치 바로 옆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오스틴 버틀러는 단순히 좋은 배우를 넘어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를 다시 세상에 불러온 예술가였다. 그는 우리에게 단순한 복고적 향수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엘비스를 선물했다. 그 연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하고 꿈꾸고 외로워했던 한 남자의 삶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스틴 버틀러 덕분에 엘비스는 단순한 과거의 아이콘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의 존재로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비판과 찬사의 갈림길, 「엘비스」에 대한 평론

영화 「엘비스」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박수를 보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영화는 찬란하고 화려했지만 그만큼 과감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엘비스」를 둘러싼 평가는 단순한 호불호를 넘어 이 영화가 바라본 엘비스라는 인물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영화는 진정한 엘비스를 보여준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신화를 만든 것일까? 먼저, 오스틴 버틀러의 연기에 대해서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가 이어졌다. 그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재현한 수준은 경이로웠다. 단순히 걸음걸이나 억양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엘비스 특유의 슬픔과 열망까지 온몸으로 표현해 냈다. 특히 무대 장면에서는 그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엘비스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평론가들이 '오스틴 버틀러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점에서만큼은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명히 갈렸다. 바즈 루어만 감독 특유의 과잉 연출과 숨 가쁘게 몰아치는 편집 그리고 현란한 색채와 음악의 향연은 일부 관객에게는 매혹적인 경험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피로감을 안겼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입체적 인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절제되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엘비스의 깊은 내면과 그의 고독과 갈등을 충분히 탐구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화려함과 비극적인 몰락이라는 외형에만 치중했다고 평했다.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는 한편으로는 엘비스 신화를 더욱 강화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과잉이야말로 엘비스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느꼈다. 엘비스는 그 자체로 시대의 과잉이었다. 록앤롤의 탄생과 할리우드식 스타 만들기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집단 열광 속에서 그는 거대한 신화로 부풀려졌다. 바즈 루어만은 이 모든 과정을 그대로 영화의 형식 안에 녹여냈다. 빠른 편집과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엘비스의 숨 막히는 현실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화면을 따라가기도 버거울 만큼 정신없는 전개가 이어지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엘비스가 느꼈던 세상의 속도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영화가 매니저 톰 파커 대령의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 점도 호불호를 갈랐다. 톰 파커는 엘비스의 재능을 발견하고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영화는 파커의 내레이션을 통해 엘비스의 삶을 비추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방식은 독특하고 도전적이었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이로 인해 엘비스의 이야기 자체가 왜곡됐다고 비판했다. 엘비스의 주체적인 목소리보다 결국 파커의 시선에 의해 필터링된 서사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접근이 흥미로웠다. 엘비스는 스스로의 인생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과 욕망 그리고 상업적 계산에 의해 조종당했다. 그렇다면, 파커 대령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보는 것은 오히려 그런 엘비스의 비극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엘비스는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히 이용당하는 존재였다. 그 모순과 아이러니를 바즈 루어만은 냉정하게 그러나 동시에 극적으로 포착했다. 결국 「엘비스」는 전통적인 전기영화의 틀을 벗어난 작품이었다. 전기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 시도는 분명 대담하고 가치 있었다. 오스틴 버틀러의 몰입과 바즈 루어만의 감각적 연출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 어우러져 이 영화는 강렬한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찬사와 비판이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엘비스」는 관객들의 마음 한편에 오래도록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 되었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바즈 루어만 감독, 화려함 속에 숨겨진 고독을 노래하다

바즈 루어만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나는 언제나 화려한 색채와 폭발하는 감정 그리고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쓸쓸함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눈부시게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고독과 상실감을 놓치지 않는다. 물랑 루즈,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엘비스에서도 루어만 감독은 세상이 만들어낸 화려한 겉모습을 거침없이 펼쳐 보이면서도 결국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과 귀가 황홀해지는 동시에 가슴 한편이 저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엘비스」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의 빠른 편집과 과장된 연출을 지적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과잉이야말로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인물을 가장 진실되게 담아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엘비스의 삶은 한순간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고 10대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며 이후 온 세계의 시선과 기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한 삶을 평범하고 차분한 서사로 풀어낸다면 오히려 엘비스의 실체를 왜곡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루어만 감독은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엘비스의 인생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영상 언어로 재구성했다. 하지만 루어만의 진짜 천재성은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고독을 결코 잊지 않는 데 있다. 「엘비스」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은 무대 위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홀로 남겨진 엘비스의 모습이었다. 오스틴 버틀러가 담담하게 바라보는 카메라,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거대한 무대 조명 아래서 한없이 작아 보이는 엘비스 이 순간들 속에서 루어만은 말없이 이야기한다. 아무리 세상이 그를 왕으로 추앙해도 결국 그는 외로웠다고 그 고독은 엘비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느끼게 되는 깊은 외로움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엘비스」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 서사로 확장된다.

바즈 루어만은 언제나 대담하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직관을 믿는다. 「물랑 루즈」에서는 사랑의 광기를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꿈의 허망함을 그리고 「엘비스」에서는 명성과 고독의 아이러니를 그러모았다. 그의 영화들은 종종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때로는 서사가 느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조차 그의 스타일 안에서는 하나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루어만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비극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그것을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관객 앞에 던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계산된 완벽함보다는 거친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엘비스」를 보며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영화 마지막 장면이었다. 오랜 세월 무대와 대중의 사랑에 지쳐버린 엘비스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빛나려 애썼고 여전히 사랑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고 있었다. 바즈 루어만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진짜 고독은 화려함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리고 그 고독은 결코 부정하거나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들은 겉으로는 화려한 파티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조용한 새벽이 찾아온다. 「엘비스」도 그러했다. 수많은 조명과 함성 그리고 환호가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은 오직 한 인간의 외로움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즈 루어만 감독을 사랑한다. 그는 우리에게 눈부신 스펙터클을 선물하면서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진심은 세상의 어떤 비판이나 논란보다 더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속에 남는다.